책 소개
우린 친구니까,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야!”
아픈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며 성장하는 애틋한 연대
‘창비청소년시선’의 스물아홉 번째 권으로 김학중 시인의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이 출간되었다. 2009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이래, 2017년 박인환 문학상을 수상하고 시집 『창세』를 펴낸 김학중 시인의 첫 청소년시집이다. 시인의 청소년 시절을 짐작케 하는 사건들이 가족과 친구들 간의 에피소드를 통해 서술되어 있다. 어려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되, 부당함에 또렷하게 저항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흙 아래로 무성히 뿌리내리는 생명력을 지녔다’는 평을 들은 시인 특유의 문체로 쓰였다. 박소란 시인의 해설과 함께 읽으면 더욱 선명하게 즐길 수 있는 이 시집은 ‘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의 장애인 예술 창작 활성화 지원 사업 선정작이다.
김학중 시인의 첫 청소년 시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출간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에는 사회의 약한 쪽에 속해 있기에 겪는 억울한 일에 맞서는 청소년 화자와 친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사회적 편견과 폭력에 노출되기 일쑤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서로 의지하며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는 쪽을 택한다. 눈이 불편한 친구를 위해 수업을 녹음해 주고, 추행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가해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소리쳐 준다.
그중 시인을 연상케 하는 ‘나’는 공부나 운동을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다른 별난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특별함으로 가득한 아이인지 알게 된다. PC방에서 지는 게임을 하는 중에도 “꺼지지 않는 희미한 빛을”(「로스트 템플」) 보는 아이, 알은 체 하지 않았다고 머리를 때리는 선배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시각 장애에 대해 이야기”(「인사의 나라」) 하며 선배를 계면쩍게 만드는 아이, 뚝심 있게 일어나 자신이 맞닥뜨린 편견과 장애에 차분하게 맞설 줄 아는 특별함으로 가득한 아이가 바로 ‘나’인 것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쫄지 않고 불의에 물러서는 법이 없이 더 끈질기게 희망을 노래하며 자신 만의 특별함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이라는 시집의 제목은 수록작 「잠수함 우리집의 항해일지」에서 따왔다. 차가운 심해에 가라 앉아 유영하는 잠수함. 그저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이 곧 인사인 고요한 심연의 바다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하루하루 잘 살아나가고 있다고, ‘나’와 친구들, 그리고 ‘나’의 가족은 끈질기게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고 조용히 음파를 내보낸다.
현재 위치, 특이한 변화 없음. 심해의 바다는 오늘도 다행히 고요했음. 여기는 밤의 심해를 항해하는 반지하급 소형 잠수함 ‘우리집’ 호. 소나수*는 낡은 이층 침대에서 불침번을 서며 항해 일지를 기록하는 중. 물고기들은 은하에서 내려오는 별빛들의 세례를 받으며 물결 속에서 잠자는 중. 우주는 바다를 탐색하며 물고기들의 잠꼬대를 듣는 중. 별들의 소나는 아직도 따듯함. 바다의 체온은 여전히 차가움. 잠항 중인 잠수함들 다수. 생존이 늘 인사임을 잘 알기에 조용히 침묵함. 우리는 바다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잠수함의 항해법. 오늘도 무책임 함장은 귀함하지 않았음. 몇 년째 귀함하지 않았지만 승조원들은 모두 무사함. 가끔 부채 어뢰를 발사하는 무슨무슨 캐피털급 핵 잠수함을 만나면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도 함. 그 외에 예상치 못한 해역에서 강력한 수압에 함정 전체가 찌그러질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음. 나는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우리집의 승조원.예상치 못한 해역에서 강력한 수압에 함정 전체가 찌그러질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음. 나는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우리집의 승조원. 승리의 날에도 침묵의 함성을 지르며 기뻐할 뿐. 가끔 이 깊은 심해를 벗어나 잠망경을 올리고 싶지만, 아직 이 바다의 표면까지 부상하지 못했음. 매일매일 항해 일지는 차가운 무한의 바다에서 미래를 향해 쓰임. 현재 위치. 하루. 하루. 이상 항해 일지 끝.
— 「잠수함 우리집의 항해 일지」 전문(101~102쪽)
일 층에서 반 층 내려가 후문으로 가는 문
그 아래 계단이 반 개
하나 같지 않은 얕은 계단이라
반 개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한다
고개를 낮추고 인사를 나눈다
이제 괜찮다 두려울 것이 없다
오늘은 이렇게 낯설어도
계단 수를 외우면
건물은 친구가 된다.
―「입학식」 부분(10~쪽)
우리가 하나였다는 거
친구였다는 거
잊지 말자
나 너희랑 친구여서 정말 행복했어
우리는 모두 울컥했다
서로 떨어진 곳에서
힘든 일을 겪더라도
우리의 기억이 서로를 지켜 줄 거라는 말 건네며
우리는 피자 한 판을 나누어 먹었고
진솔이는 치료식을 꺼내 먹었다
먹는 모습이 함께 달라서 즐거웠다.
그해 겨울바람은 매섭고 차가웠지만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헤어지며 나눈 포옹은
따듯하고 포근했다.
―「마지막 만찬」 부분(88~90쪽)
학중이 강조하는 희망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 “희망은 그렇게 비웃음을 받는 것들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 어쩌면 속으로 수차 되뇌었을 오랜 주문. “지금까지 살아가며 하루하루 쌓아 온 시간이 / 나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내가 살아 낸 희망은 불구가 아니었으므로”(「대입 면접」). 희망은 불구가 아니었으므로, 희망은 불구가 아니었으므로…….
이제 남은 건 오늘에서 내일로 걸음을 내딛는 학중을 응원하는 일이다. “포기를 모르는” 그를. 그와 같은 친구와 함께라면 약하고 소심한 내게도 여기 “차가운 무한의 바다”는 견딜 만한 곳이 된다. “현재 위치.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 보게 된다.
―「해설: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고」(박소란) 중 발췌
시인의 말
울면 지는 줄 알았던 날들은 가고
안 된다고
너는 안 될 거야라고
뒤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과도
모두 조용한 인사를 나누고
기쁜 얼굴로 헤어졌으니
이제는 울어도 괜찮다고
누구도 네가 약하다고 하지 않을 거라고
언제나 눈물이 조금 고인 눈으로 본 흐린 세상은
배경이 조금 날아간 사진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밝고 아름다웠으니
다 울고 나면 그때는 웃어 보라고
그리고 그리고 괜찮으면
너의 목소리로 시를 쓰려무나.
나를 내어 줄게.
―시인의 말(부분)
저자 소개
김학중 (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천적 저시력 장애인이다. 저시력 장애인이란 말이 낯선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장애인이면 장애인들이 하는 일을 하며 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이 몹시 아프게 들렸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미래가 제한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살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있다.